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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 불교 역사, 불교 개념, 불교 공부

초기불교에서 신에 대한 관점

초기불교에서 신에 대한 관점

초기불교에서 신에 대한 관점
초기불교에서 신에 대한 관점

신에 대해서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초기불교에 대해서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종교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기불교 - 신에 대한 묘사

초기불교 경전을 잘 살펴보면 신에 대한 묘사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막후에 다른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깨달은 내용을 설법해달라고 간청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가 신입니다. 범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또한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다섯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설파한 연후에, '이제 진리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되었다'라고 찬양했던 존재들도 역시 신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신에 대한 묘사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절대적 유일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여 초기불교를 무신론으로 보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붓다가 가르친 주요 교설들은 경험세계에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경험의 영역에 그 가르침의 초점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경험세계를 떠난 절대적 존재 혹은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주된 지위를 차지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신에 대한 언급들이 있는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신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현상에 대한 은유로 묘사됐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의 바람이나 희망 따위를 신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서 구체화하여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초기불교 경전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식의 신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따르면, 객관적 실재로서의 신은 부정이 된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관과 관련해서 저는 좀 거시적인 안목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를 우리의 마음과 연결시켜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마음 혹은 인간의 인식 능력 혹은 해석 능력과 무관하게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세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더불어서 이 세상에 대한 해석은 반드시 인간의 인식능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바로 이런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욕망의 세계, 욕망을 떠난 세계 즉 이것은 욕망이 없는 물질세계, 마지막으로 물질세계마저 떠난 무색계의 세계입니다.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삼계(三界)가 우주 모든 존재를 포섭하는 이 세상 전체가 결국은 우리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불교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신을 굳이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범부 인간 혹은 중생들이 신이 존재하고 있다 고 생각하는 한에서 우리는 신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불교 경전 상에서 드러나는 신에 대한 묘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인도철학에서 나타나는 신

일반적으로 인도철학에서 나타나는 신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자연현상을 의인화해서 하나의 신격으로 표현해낸 자연주의적 다신교(多神敎)로서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정령신앙이라든가 혹은 무속신앙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늘신, 바람신, 태양신 구름 신 여러 유형의 자연 현상을 의인화해서 거기에 대해서 숭배하는 양상의 다신교적 양태의 신과 더불어서 모든 신이 하나로 통한다. 즉 드러난 모습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신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결국에는 궁극에 있어서는 모든 신은 하나의 신이라는 단일신교(單一神敎)신 관념, 더불어서 단 하나의 신이 일체의 모든 존재를 만들었고, 그 하나의 신과 비유할 자는 결코 아무도 없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유일신교(唯一神敎)적 신관입니다. 이렇게 인도 철학사에서는 단일신교적 신관, 다신교적 신관, 유일신 교적 신관 등 이 모든 형태의 신관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초기불교 경전에 주로 등장하는 여러 신들은 다신교적 신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나타나는 보살사상은, 다시 말해서 여러 유형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약사 보살 등은 결국에는 우리 마음의 표상으로서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드러난 다양한 형태의 신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통한다는 믿음과 더불어서 단일신교적 색채를 지닌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후반에 등장한 정토교와 이 정토교에서 귀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미타불(Amitābha-Buddha) 같은 경우에는 유일신 교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사상에서 그 원어가 되는 아미 따 아브아(Amita-ābha, 無量光) 원어가 이렇게 되는데요 아미 따(Amita)는 생각할 수 없는, 아브아(ābha) 하면 빛(光)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사고의 능력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의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대승불교의 정토교에서는 굉장히 강조가 됩니다. 이것은 개개인의 능력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신성의 의미를 그 원어에서 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 사상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교적 종교 양상에서 볼 수 있는 신관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을 신봉하는 정토교에서는 현실의 모든 고통마저도 중생들을 극락으로 이끌기 위한 아미타불의 은혜 혹은 은혜로운 방편이라고 해석을 하면서 우리를 고통의 상황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끊임없이 희망과 꿈을 줄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에 대한 관념을 불교에서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이 정서적 안정감을 주어왔다는 사실을 불교에서도 일부분 인정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게 되면 스스로의 삶에 책임의식이 결여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명확하게 언급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비판합니다. “만일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면, 생명을 죽이더라도 신의 창조에 의해서일 것이고, 도둑질을 하더라도 신의 창조에 의해서일 것이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신의 창조에 의해서일 것이다 …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신의 창조에 의한다고 완고하게 고집하는 자에게는 도무지 의욕이나 열의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확고하게 알지 못한다(AN. I. 174). ” 이러한 맥락으로 신에 대한 믿음에 지나치게 경도되는 그러한 문제점을 붓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붓다가 바라본 신관(神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