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의 금욕주의 개념과 해석
금욕주의는 내면의 욕구를 경계하고 가라앉혀서 그러한 욕구가 가라앉은 상태에 이르려는 종교적, 철학적 경향을 일컫는 말이 되겠습니다. 바로 이 금욕주의 또한 초기불교 당시 붓다의 주변에서 유행했던 사상적 경향이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 역시 일정 부분에서는 금욕적 색채를 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면의 탐욕과 갈애로부터 발생하는 갖가지 괴로움을 다스리고 그 괴로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금욕적 태도가 필요하다. ' 바로 이 부분을 초기불교에서도 가르치고 또한 실천했습니다. 불교가 이러한 금욕적 색채를 갖는다고 했을 때, 불교에서의 금욕주의와 그때 당시 불교 이외의 다른 종파들에서 실천했던 금욕주의를 비교함으로써 불교라고 하는 종교적 색채를 좀 더 선명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바라문교의 금욕주의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
불교 이외의 종교 중에서 특히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띠었던 두 흐름은 바라문교의 금욕주의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가 되겠습니다. 바라문교의 금욕주의는 바라문 사제들이 행했던 제사 의례와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바라문 사제들은 특정한 제사를 수행하기 위해서 몸을 정화하고 마음을 산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육체적으로 고행(苦行)을 해나가고 여러 가지 금욕적 실천을 행했습니다. 예컨대, 추위와 더위에 일부로 몸을 노출시킨다거나 혹은 하루 종일 태양을 바라본다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는 것처럼 여러 유형의 금욕주의적인 양태들이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는 고유한 형이상학적 견해에 기초해서 금욕주의를 체계화했습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본래 순수한데 그 순수한 영혼에 업의 불순물이 끼여 있다는 형이상학적 믿음을 지녔습니다. 바로 이 영혼에 끼인 업의 불순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자이나교에서는 가혹한 육체적 고행을 행해야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이런 고행은 굉장히 엄격한 형태로 진행되었고 그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 차후 불교의 수행론과 비교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불교에서는 '내면의 정화가 깨달음 혹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라고 본 반면에 자이나교에서는 '한번 우리의 영혼에 축적된 업은 반드시 물리적인 고행을 통해서만이 제거될 수 있다. '라는 관념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깨달음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맞는 고행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고행을 통해서 그 업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했을 때 비로소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그걸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적 실천법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업과 그 업을 정화하는 수단으로써 고행을 생각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이나교에서는 극한적인 형태의 무소유 혹은 극한적인 형태로 나아갈 경우에는 몸에 걸치는 옷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나체 수행으로 나아갔습니다. 또한 이 완전한 고행의 성취를 위해서는 음식을 줄여나가서 결국에는 단식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방법 따위의 양상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바라문교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는 대체로 외적인 형식을 중요시하는 그러한 형태의 금욕주의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특히 바라문교의 제식주의에서는 내면의 동기와 상관없이 특정한 행위만 절차에 따라서 정확히 하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미래의 어떤 길흉화복이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면의 정화와는 상관없이 밖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고행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다음에 자이나교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깃든 욕망 자체에 대해서 반성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바라문교의 제식주의적 금욕주의보다는 좀 더 개선된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가차 없이 고행의 상태로 내모는 극단적인 모습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졌던 까닭에 자이나교의 신봉자들은 숨 쉬면서 벌레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숨을 쉬는 동안 자연스럽게 실수로 벌레를 우리가 마셔버리면 벌레를 죽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기가 걸어가는 길을 빗자루로 쓸고 다니면서 개미 한 마리 밟지 않게 하는 그런 형태의 극한적인 양상으로까지 나아간 금욕주의를 실천했습니다. 이건 결국 그들의 사회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붓다 또한 '정신적인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얼마간의 금욕은 필요하다. '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절제 없는 삶은 나태와 불건전으로 이어지기 쉽기에 붓다는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는 적정한 선에서의 고행을 감행하는 방법을 권장한 경우도 있습니다.
붓다의 금욕주의
붓다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내면의 갈애와 탐욕을 조절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으로만 간주했지 그것 자체가, 다시 말해서 금욕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금욕주의를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붓다는 탐냄과 성냄 따위의 노예로 살지 말고 그들의 실체를 깨달아서 의연하게 살아나가는 힘을 기를 수 있는 한에서만 금욕적 실천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내면의 의도를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금욕주의적 실천은 언제나 깨달음의 문제와 연계시켜 설명하곤 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은 그러한 형태의 금욕적 실천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을 바른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라고 하는 그러한 메시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불교는 당시 유행했던 금욕주의와 일정 부분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그러한 형식적 금욕 행위에 걸리지 않는 점에서 독자적인 모습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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