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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숙명론

초기 불교의 숙명론

초기 불교의 숙명론
초기 불교의 숙명론

숙명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숙명론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숙명론은 사실 고대 인도에서도 굉장히 유행했지만 오늘날에 있어서까지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불교를 숙명론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경향마저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불교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의 오해로 '뿌린 대로 거둔다. '는 말과 무슨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전생의 업보다'와 같은 표현들을 쓰곤 합니다. 여기에서 '불교적 가르침이 숙명론과 굉장히 유사하다. '라는 그릇된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숙명론과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와 숙명론의 구분

불교에서 궁극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해탈 혹은 열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숙명의 굴레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숙명론과 불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철학의 무대에서 숙명론을 표방했던 대표적인 학파로는 아지비까(ājīvika) 혹은 한역에서는 사명 외도(邪命外道)라고 부르는 종파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선한 행위를 하든 혹은 악한 행위를 하든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는 결정된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고, 결정된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등의 가치판단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아지비까에 따르면 운명이라든가 천성 등은 현재의 자신이 있게 된 이유에 해당합니다. 아지비까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고 그다음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도 운명이다. 따라서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다.'는 가르침을 피력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듯이 바로 이런 가르침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를 개입시킬 여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지비까의 숙명론적인 사고가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오늘날에도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까지 많은 영향과 함께 그 잔재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미래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사주라든가 관상이라든가 혹은 미래에 대한 점을 친다거나 하는 그러한 미신적 관행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숙명론적 사고의 잔재를 보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아지비까의 숙명론적인 사고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는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 특정한 나라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 특정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 ' 과 같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우리 의지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이걸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 이것이 약간 비속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경각심을 분명히 해줬다는 점에서 아지비까 사상이 긍정적인 측면을 지닐 수 있음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서 고대 붓다 당시에 존재해 있었던 아지 까는 해탈의 가능성도 인정했습니다. 다만 불교나 자이나교같이 수행을 통해서 해탈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운명대로 살다 보면 종국에 가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그 모든 업이 다 소멸되고 나면 저절로 해탈의 상태에 우리가 도달하게 된다. '라는 방식으로 해탈의 가능성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숙명론에 대해서 혹은 아지비까의 사상에 대해서 가볍게 취급할 만한 것은 아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지비까의 사상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붓다는 자신만의 비판적 관점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의지적 노력과 그에 따른 의지적인 성취 부분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아지비까가 초기불교의 출현에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하는 측면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붓다의 아지비까에 대한 평가

붓다에 따르면 아지비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들이여, 만일 그대들의 의견대로라면 생명을 죽이더라도 이전에 정해진 원인에 의해서 일 것이고 도둑질을 하더라도 이전에 정해진 원인에 의해서 일 것이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이전에 정해진 원인에 의해서 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아지비까 사상의 맹점을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고 나서 그 결론으로서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이전에 정해진다고 완고하게 고집하는 자에게는 도무지 의욕이나 열의가 있을 수 없고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이와 같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확고하게 알지 못한다. (AN. I. 174)”라고 하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가 불가항력적인 요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하는 부분에 대한 자율적인 의지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실천수행을 통해 우리의 운명이 개선될 수 있는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