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와 철학의 구분
불교와 철학에 대해서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철학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이 불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불교를 좀 더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불교가 철학의 일종으로 해석될 여지 또한 적지 않습니다. 붓다는 어느 종교가들보다도 철학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보였고 또한 당시 유행했던 여러 사상적 경향들을 두루 섭렵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합리적인 사고의 토대 위에서 제시되었고 경험세계에 대한 분석과 해명에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할 때 우리는 불교를 철학으로 보는 것들에 대해서도 얼마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라고 하는 측면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하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철학의 구분
붓다는 일방적인 사색 혹은 견해의 추구가 오히려 바른 깨달음과 궁극의 평온 그리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바로 이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철학이라고 하는 것과 얼마간 구분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필로스(philos) '사랑'이라고 하는 말과 소피아(sophia) '지혜'라고 하는 말의 합성어로서 온전히 번역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정신적 사유 활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우리가 철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한자 어식 번역어로서 밝을 철[哲] 자 그리고 배울 학[學] 자 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풀이하면 '배움에 밝다' 혹은 '배움을 밝히다'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번역어 또한 단순한 배움 자체 혹은 우리에게 누적되는 어떤 지식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지식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필로소피 아라고 하는 철학의 의미를 얼마간 잘 반영한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철학이라고 불교적 가르침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붓다는 당시 사상가들에 대한 첨예한 비판의식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했습니다. 또한 붓다의 뒤를 이은 붓다의 제자들 역시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주변 사상들과의 교류 속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시대적으로 재해석해내려고 하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드러나는 부파불교·중관 불교·유식불교 등의 새로운 흐름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불교의 역사적 흐름은 우리가 서양철학사의 진행 과정과 비교해볼 때 굉장히 유사한 양상을 지닌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이런 철학의 흐름과 불교라는 종교의 흐름은 뚜렷이 구분이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불교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사변적 논의 혹은 학문적 토론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 혹은 방편의 차원에서만 용인이 되었다는 바로 그러한 사실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철학이라고 하는 낱말에 해당하는 원어로서 싯단따(siddhānta)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싰다(siddha) 즉 '성취'라고 하는 말과 안다(anta) '궁극'이라고 하는 말의 합성어로서, 온전히 번역하자면 '궁극의 성취'가 됩니다. 인도인들은 궁극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배움 혹은 학문적 가르침에 접근했습니다. 또한 불교 역시 열반 혹은 해탈이라고 하는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가르침과 주변의 종교들과의 토론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했습니다.
불교의 태도
불교의 태도는 궁극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논리적 이성적 사유가 얼마간 유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내용들이 궁극의 깨달음 자체를 보장한다거나, 혹은 궁극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충분조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붓다와 그 제자들은 단순한 지혜의 추구에 매몰되지 않았고, 해탈과 열반이라고 하는 궁극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합리적인 사변마저도 뛰어넘는 바로 그러한 것이 요구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싯단타(siddhānta), 다시 말해서 '궁극에 대한 성취'라고 하는 말은 철학(哲學)이라는 말보다는 불교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드러내는데 더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붓다와 그를 따른 그 제자들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인간의 실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실제의 삶과 연관해서 현실을 통찰했고, 또한 머리만이 아닌 가슴과 정서로써 진리에 접근해나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점에서 불교의 학문 혹은 불교의 수행전통은 지혜 일변도의 발달 여정을 밟아온 서양에서의 철학과 다른 특징을 보인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에서의 학문 전통은 '중생의 구제'라는 방향성과 교리와 실천의 측면에서 궁극의 목적인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라는 방향성을 놓친 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붓다는 이성적인 지혜뿐만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는 측면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이성적으로 접근해나가는 길을 허용하지만, 붓다에 대한 깨끗한 믿음을 통해서도 궁극의 과정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열어주었습니다. 붓다에 따르면 믿음은 의심에 찌든 마음을 정화하고, 불신과 불안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고 이야기가 됩니다. 더불어서 지혜는 이러한 믿음과 수반이 될 때 교만과 방탕으로 나아가는 것이 막아질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는 믿음이라고 하는 요소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는 이야기들이 초기불교 경전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더불어서 초기불교 경전 도처에는 붓다에 대해서 혹은 그 가르침에 대해서 “목숨을 다하여 귀의합니다(pāṇupetaṃsaraṇaṃgataṃ)”라고 하는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불교라는 것을 철학이라는 지혜 일변도의 과정으로 보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곤란함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불교라는 가르침을 철학이라고 하는 테두리에 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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